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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의 가을산책

지금은 가을이 지나가는 시간입니다. 눈앞 가득 11월의 나무가, 먼 산의 능선들이, 차가운 하늘이 다가옵니다. 은행나무마다 창백한 노란 낙엽들을 길 위에, 또 언덕의 마른 잔디와 풀숲으로 날리고, 단풍나무 아래에는 붉은 꽃잎처럼 작은 잎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습니다. 어느덧 잎보다 무수한 가지들이 그 곧고 휘어진 선들을 드러냅니다.

 

모처럼 선선한 캠퍼스를 걸어봅니다. 순환로를 둘러 아름드리 왕벚나무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어쩌면 서울대가 이곳에 있기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해 온 원주민이었을 그 나무들의 화사한 가지들 사이로 엷은 오후의 햇살이 번지고 있습니다.

어느 봄날이었던가.. 본관으로 걸어 내려가는 길에 한 벚나무 밑에 멈춰선 적이 있습니다. 엷은 분홍빛을 띤 투명한 작은 꽃잎들이 내 온몸으로 쏟아져 오는 듯 너무나 찬란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간이 멈춘다는 걸까요? 그때 그 날처럼, 살아 숨쉬며, 피었다 지며, 또 수런거리며… 관악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바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공릉동 공대캠퍼스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유학을 떠났다가 6년만에 돌아와 85년부터 서울대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으니, 저는 이곳에서 30번의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보냈습니다. 관악에서 학생시절을 보내지는 않았는데, 다만 ROTC후보생이던 대학원 시절, 식목일이면 동기들과 함께 나무를 심으러 이곳에 왔었습니다. 하필 그 날마다 비가 내렸던 기억이 납니다. 흠뻑 비를 맞으며 골프장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던 순환도로변 언덕배기에 어린 나무들을 심고 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관악의 어딘가에 그때 내가 비 속에서, 이름도 모른 채 심었던 그 나무들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숨을 쉬며, 자라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이따금 해봅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입학했던 섬유공학과는 이름이 재료공학부로 바뀌었습니다. 70년대 우리나라를 이끌던 섬유산업은 80년대 합섬수출 세계1위국이라는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에 들어서고, 대신 첨단산업의 다양한 신소재들을 개발해내는 학문으로 확대 개편되어간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강의실과 연구실에서만큼은 나는 학생들에게 요구가 많은, 아주 엄격한 교수가 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이 공간에서 받은 애정 어린 교육과 훈련이 평생 그들의 자산이고 나아가서는 국가의 자산이 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난 수많은 학생들은 마치 관악의 나무들이 잎이 나고, 꽃을 피우고, 한껏 푸르러지고, 단풍이 들고, 앙상한 가지로 겨울을 견디듯 청춘의 시간들을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사랑하고 고민하고 기뻐하고 애달팠을 그들의 애틋한 시간이 떠들썩한 학생식당 창가에, 도서관의 시원한 그늘에, 넓은 잔디밭에, 음악감상실에, 밤늦게까지 서성이던 연구실의 탁자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 어디엔가, 청년에서 장년으로 조금씩 걸어온 나의 모습도 있을 것입니다.

관악에서 강의실을 제외하고 첫 번째 내 자리는 39동 4층에 있는 교수연구실입니다. 크지 않은 방에 넓은 책상과 빼곡한 책들, 딸아이의 대학졸업사진이 놓인 이곳은 오롯이 나 혼자만의 공간입니다. 이곳에서 나는 수업을 준비하고, 학생들의 논문을 읽고, 글을 쓰고, 간혹 찾아온 학생들의 고민을 듣습니다.

교수란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 테두리 안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머리를 비우고, 충전하며,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공대학장 시절에 정년을 맞은 두분 명예교수님께 같이 쓰시라고 연구실 하나를 마련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 교수님이 상의해 서로 시간을 엇갈려가며 연구실을 공유하시더군요. 그 때 새삼 교수란 직업인에겐 어쩌면 외로워 보일 수도 있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수조건임을 깨달았습니다.

두 번째 공간은 지난 2003년 지식경제부 지정으로 학교 안에 만든 패션신소재연구센터(FTC)와 2005년 과기부와 과학재단 지정으로 설립한 지능형텍스타일시스템연구센터(ITRC)입니다. 관련 분야 교수들과 오랫동안 서로의 연구 아이디어를 연계하여 혁신적인 연구결과를 내고 새로운 주제를 창조하기 위해 공유했던 시간과 기억이 있는 매우 소중한 곳입니다. 세 개의 실험실을 곁에 두고, 5명의 연구원과 2명의 행정직원이 일하는 이곳의 소장실에서 나는 갖가지 센터관련 행정을 체크하고, 외부 손님을 만나고, 대학원생들과 세미나를 갖습니다. 우유를 넣은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이따금 연구실의 학생들을 불러 피자파티를 열기도 합니다. 바쁘게 일을 하지만, 실은 마음의 긴장을 풀고 휴식도 취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공간은 호암교수회관입니다. 이곳을 서울대의 다소 괜찮은 식당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낯선 말일 것입니다. 이곳에서 나는 공대학장 시절 같이 단과대 학장을 지냈던 서울대교수 24명으로 국가미래전략연구팀을 만들고 두 달에 한번쯤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한 다양한 학제적 연구에 머리를 맞댑니다. 강의준비에도 바쁜 교수님들이 시간을 쪼개 열심히 협력해 줌으로써 우리는 지난해 ‘융복합 학문시대 국가 미래 R&D 어젠다 발굴을 위한 기획연구’라는 연구성과를 사회에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또 호암교수회관 뒷 건물 작은 연회공간에서는 한 달에 한번 저녁모임이 이뤄집니다. 국가미래전략연구팀 교수님들과 변호사, 정치인, 기업인 등 사회 각 부문에서 일하는 70여명의 회원들로 구성된 미래창조공부모임입니다. 이 모임에서는 서울대 내부의 교수님 한 분과 외부의 전문가나 행정가 한 분을 모시고 우리나라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많은 것을 공부합니다. 어디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다양한 강의가 모임의 자랑입니다. 한 분 두 분 회원들이 모여들어 자리를 채우고, 환하게 웃음 띤 얼굴로 인사와 덕담을 나누는 그 순간 저는 가장 행복합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무언가를 이룬 리더들이 얼마나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열망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으며, 학문세계에서만 살던 교수들도 큰 깨달음에 기뻐하시는 걸 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학생들을 이 사회와 미래가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키워내면서 저는 저와 우리 학생들이 이 사회로부터 얼마나 혜택 받은 사람들인가 생각하곤 했습니다. 우리가 사회로부터 받고 있는 관심과 기대가 부담이기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라는 자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우리가 세상에 진 빚을 갚아가는 사회인들이 되어주길 기대했습니다.

언제부턴가 저 자신은 상아탑 안에 학문을 가두지 말고, 그 성과를 사회발전에 보태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마음을 공유하는 교수들과 국가의 미래를 위한 주제별 연구를 하고, 학교 밖 사람들을 모아 국가와 사회의 이슈를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학문은 살아있을 때, 움직이고 변화하는 사회와 만날 때 맘껏 확산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놀이동산에서 온종일 피곤하게 놀고 돌아서듯, 하루 일과를 마치고 연구실을 나섭니다. 산자락에 어느덧 저녁어스름이 내려앉고, 그 위로 점점이 꺼지지 않은 연구실들의 불빛이 떠있습니다. 자동차의 시동을 켜면 벌써부터 살아있는 관악의 모든 것이 만들어내는 수런거림과 그 평온한 적막이 그리워집니다.

관악에서의 30년, 고맙고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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